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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구원

거듭남을 넘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영광스러운 구원으로 우리는 지금 성경적인 신학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 교회에는 성경적인 신앙보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으로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신앙이 아닌 신념, 성경적인 신학이 아닌 자기만의 독선적인 개념이 판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인 신학이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해버리고, 더 이상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the word of the beginning of the Christ)에 머물러 있다. 오늘날 성경적인 구원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나름대로의 다양한 견해와 이견(異見)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
거듭남을 넘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영광스러운 구원으로

우리는 지금 성경적인 신학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 교회에는 성경적인 신앙보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으로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신앙이 아닌 신념, 성경적인 신학이 아닌 자기만의 독선적인 개념이 판치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인 신학이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해버리고, 더 이상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the word of the beginning of the Christ)에 머물러 있다.

오늘날 성경적인 구원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나름대로의 다양한 견해와 이견(異見)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복음」,「 사영리의 복음」, 「거듭남과 죄 사함의 복음」등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모두가「성화를 동반하지 않는 구원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쨌든 당신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자, 당신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당신에겐 무엇이 변했는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변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믿었고, 누구를 영접한 것인가? 바로「성화 없는 구원」이다. 바로「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 있는 예수」이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보자. 나의 삶 속에 성화의 싹이 자라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거룩한 인격을 향한 한 발자국을 떼었는가? 나의 구원은 과연 영광스러운가?

문제는「성화 없는 복음」,「 성화를 동반하지 않는 구원」이다. 과연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왜 복음은 편만하게 전파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볼 수 없는 것인가? 믿기 전보다 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움켜잡고자 욕심을 내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이상한 복음과 반쪽짜리 구원이 한국 교회의 정통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한국 교회는 자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또 진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안티 기독교 단체로부터 무수한 공격과 지탄을 받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면, 자신은 구원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거듭났는지는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이 거듭난 것은 확실한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를 믿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세속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신앙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림자 신앙인들도 상당수 있다. 일이 이럴진대, 가장 성경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 설사 누군가 거듭남과 중생을 말한다 해도, 사실은 거듭남과 중생에 대한 정의도 다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의 의미를 너무 좁혀서도 안되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된다.

분명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준다. 하지만 출생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거듭남을 넘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끌어 간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거듭남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부이다. 거듭남은 출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결혼을 의미한다. 출생과 결혼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같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이 없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없고, 출생이 없다면 결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일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일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성경적인 구원론을 마음에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구약성경 66권을 주셨다. 구원이란 단어를 신약성경에서만 검색해보아도 160회 가량 나오는데, 실제로는 영어의 saved라는 단어로 120회, salvation이란 단어로 41회 등장하며, 그것도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고루 등장한다. 이 때문에 많은 성경학도들이 구원의 의미를 너무 좁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너무 넓게 생각하는 현상이 생겼다. 흔히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로 보기도 하고, 영의 구원, 혼의 구원, 몸의 구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아도 역시 우리 삶에 성화의 실제를 가져다주기엔 역부족이다. 무엇이 성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것도 십자가였다(갈 6:14). 그리스도를 못 박은 십자가 뿐 아니라, 나를 못 박은 십자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비로소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다(갈 2:20, 5:24, 롬 6:5).

그렇다면 영광스러운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거듭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과연합을 이루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엮은이는 가장 성경적인 구원을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거듭남이란 든든한 주춧돌을 놓고, 영원 속죄를 통해서 죄 사함과 칭의라는 기둥을 세우고, 영적 해방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머릿돌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될 때에야, 우리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구원을 소유한 자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아름답게 단장되어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빛을 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이 책의 진정한 저자는 19세기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불린「플리머스 형제단 운동」의 지도자로서 존 넬슨 다비이다. 플리머스 형제단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조지 뮬러, 로버트 채프만 등과 더불어 다비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다비의 이름은 그간 한국 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비는 종종 워치만 니의 영적 멘토이자 스승으로 소개되곤 했으며, 미국 달라스 신학대학원, 그레이스 신학대학원, 밥 존스 신학대학교, 엠마오 성경대학교, 그리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신학의 근간과 초석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 왔다.

다비의 빼어난 저작 가운데 성경주석 시리즈(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가 있다. 이 책은 무디 기념 교회에서 목회했던, 복음주의계의 거장 해리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불후의 명작으로 추천할 정도로,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주는 놀라운 주석서이다. 이 주석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문자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성경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열어주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다비를 통해서 우리 시대에 전수된 문자적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의 진정한 영적 권위를 드러내주고, 게다가 성경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최종적인 권위임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성경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가까이 두고 읽고 묵상하고 또 공부해야 하는 영적인 보고(寶庫)임을 알게 해준다.

이 책은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따라 성경을 묵상한 다비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이 풀어지고 열리게 된 복음과 관련된 여러 글들과 묵상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론을 담아낸 책」이라 할 수 있다. 각 부분 자체만으로도 연구하고 묵상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함께 모을 때 복음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다비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써내려간 책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제의 글들을 엮은이가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서 엮어보았다. 물론 독자들 가운데는 굳이 이 순서를 따르기 보다는 각자의 영적 필요에 따라서 먼저 읽고 싶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우선적으로 마음에 와닿는 주제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지라도, 이 책을 전체적으로 다 읽으시기를 간청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기독교 이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스승에게서 배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어떤 독자는 이런 말을 했다.

“형제들의 집에서 발행된 책자를 통해 더 깊은 영성을 접하게 되니 흥분이 되고 기쁩니다. 영적 해방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책자를 이제 단 두권만 읽었을 뿐인데, 지난 33년 동안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깨달았다는 것이 다 더러운 옷같고, 악취가 나는 것들을 은혜라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주님의 사역을 곡해(曲解)했을 뿐만 아니라 역도(逆道)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어렵고 생소하고 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겸손한 자에게 은혜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독자의 영적 역량에 따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마시는 것 같은 생수의 시원함을 느끼며, 복음이 가진 영적 광대함과 영적 깊음 속으로 더욱 빠져 들어가는 엄청난 영적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고 안이한 신앙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진리를 다루는 책을 만나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이고,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삶을 좌우할만한 주제이기에 조금만 인내하고 끝까지 이 책을 완독하기를 바란다. 분명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가 주는 달콤함과 풍성함을 길이길이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을 주고 싶어 하신다. 다비는 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로마서 7장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우리 신앙의 정수(精髓)와 정도(正道)는 로마서 8장에 있다. 만일 당신이 받은 구원의 경험이 로마서 7장에 있다면, 즉“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절)라는 상태에 있다면, 당신의 구원은 결코 영광스럽지 않다. 이 책은 분명 당신의 구원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바른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복음을 주시고(고후 4:4, 딤전 1:11),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우리에게서 영광스러운 구원을 이루심으로써(빌 1:6), 모든 영광을 홀로 받으시길 바라며, 이 책을 독자들의 손에 내어드리는 바이다.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일컬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카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부직을 1827년에 사임했고, 그 이듬해 에는 벨렛(J.G. Bellett), 허친슨(F. Hutchinson), 파넬(Lord Congleton-John Parnell), 그로브스(A.N. Groves), 크로닌(E. Cronin), 스토크스(W.J. Stokes) 등 6명의 신앙동지와 함께 성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기성 교계와 결별했다. 이들을 가리켜 세칭 ‘더블린의 7형제’란 부르며, 교회 역사상‘형제 교회’의 시발점이 된다. 이들은 교파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하여 형제와 자매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플리머스 형제 교회(Plymouth Brethren Assembly)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채프만(R.C. Chapman)이 반스테플에서, 크레익과 조지 뮐러가 브리스톨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뉴톤의 매부이며 저명한 본문 비평가였던 트레겔레스(S.P. Tregelles)가 1836년에 영접되었다.

다비는 그리스도인의 간증(The Christian witness)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다비의 성경주석(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도 이 무렵 출간되었는데 5권으로 되어있는 이 저서야 말로 성경학자들에 의해 극찬을 받고 있는 불후의 걸작이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유럽 각국어에도 유창해서 그가 번역한 불어 성경은 프랑스 전역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새번역으로 불리는 그의 영어 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기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밖에도 독일어, 이태리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논문과 설교는 윌리암 켈리(W. Kelly)가 편집하여 32권으로 집대성했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식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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